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북 선제 타격 (문단 편집) === 1994년 위기 ===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빌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폭격을 검토했지만, 실행에 들어가기 직전에 전면전을 우려한 김영삼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이는 실제 협상결과를 숨기기 위해 퍼뜨린 이야기로, 실제로 당시 [[대통령비서실]] 통일안보 비서관이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은 선제타격에 동조했지만 미합중국 국무부와 국방부가 먼저 선제타격했을 때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과 피해 규모를 추산해보니까 정치적 뒷감당은 물론이고 경제적 손실까지도 답이 없는 수준의 피해규모[* 워 게임 결과 최악의 시나리오긴 하지만 미국군 사상자만 5만으로 분석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영프독이 등도 대북 선제타격에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한국군과 민간인 피해는 그 10배 정도인 50만여 명으로 추정되었는데 이 정도면 사망자만 8만에서 10만은 잡아야 하고, 여기서 민간인 피해가 최소 3분의 2를 차지할 것이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독일민간인 사망자도 아니고 총사상자가 십수만 명이었는데 베를린이 아예 갈아엎어졌음을 감안하면 사망, 실종자 6만은 수도권 및 '''서울이 완전 거덜날 정도의 피해를 입는다는 뜻이다.''' 민간인 피해야 그렇다쳐도 경제적 손실은 답이 없는 수준. 클린턴은 실제로 '''선제타격을 포기한 근거로 한국측의 사상자가 많게는 수십만 단위. 그리고 무엇보다 총재산피해가 1조 달러'''가 될 것이라 분석되었다는 점을 들었다.]가 나온다는 결과에 충격을 먹고 선제타격작전을 접고, 김일성과의 화해를 위해 이전부터 협상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김대중]](당시는 정계은퇴후 해외에서 야인생활중)의 비밀추천으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에 특사로 파견해서 비밀회담 끝에 선제타격은 없던 일로 하고 핵포기를 전제로 화해모드로 간 것이라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s3QeKF8IYOs|정세현 전 장관의 증언 보기.]] 나중에 "차라리 이 때 북한을 침공했었어야 했다"는 소위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는 주장도 있다.[* 위의 발언을 꺼낸 정세현 장관이 증언하길, 아, 김일성이 이렇게 귀신 같이도 빠져나가는 구나!라는 표현을 썼다. 김영삼 대통령 역시 당시에는 내가 북폭을 막았다라고 대외적으로 밝히긴 했지만 실제로는 기회를 놓쳤다고(+김대중에게 대북정책 주도권을 뺏겼다고) 매우 화를 냈다고 밝혔다.] 1994년 당시 북한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붕괴위기, 중국군은 아직 현대화되지 않아서 미국군은커녕 핵을 제외하고 [[한국군]]에게도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러시아는 강단도 없었고 무기력하던 [[보리스 옐친]]이 제대로 국정을 이끌지 못해서 제 앞가림도 하질 못했었다. 그리고 미국은 [[9.11 테러]] 직전이라 아프간과 이라크의 수렁에 발을 담그기 전이었고 유럽 및 중동 주둔 미국군까지 별 부담 없이 빼서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었다. 비록 한반도 전체엔 어느 정도의 인명피해가 벌어졌을진 모르겠지만 중국과 러시아방해 없이 북한을 완벽히 제압하고 대한민국이 90년대부터 현재까지 가장 적은 피해로 [[통일한국]]을 세울 수도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쳤다는 주장이다. [[http://m.chosun.com/news/article.amp.html?sname=news&contid=2017080601659|#]]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한이 북한의 군사력을 확실히 압도하게 된 2000년대 후반 이후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당시의 상황은 달랐다. 주로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20대 이하 밀덕들 사이에서 이런 주장이 횡행하는데, 1993년 당시 한국군의 전력은 지속적으로 현대화가 진행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북한군의 물량을 질로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국군의 군사력 증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K-2 전차]],[[K-9 자주포]],[[F-15K|F-15k전투기]],[[K-239 천무]],[[천궁(미사일)|한국판S-350 천궁지대공미사일]],[[이스칸다르 미사일|러시아의 기술이 녹아들어간]] [[고위력 현무 탄도미사일]],[[이지스함]] 등의 고성능 무기들이 90년대 중반에는 없었다!'''[* 주요 장비들을 보면 [[K-1 전차]]는 아직 배치중인 단계라서 [[제26기계화보병사단]]조차도 창설준비단계였고 수방사 예하의 전차대대들마저도 [[M48]] 계열을 보유했다. 보병사단의 전차부대들도 중대에서 대대로 확대하는 과정이었고, 아예 전차가 없는 보병사단들도 꽤 있었다. 북한군 야전포병에 대해서 확고한 우위를 보장해준 일등공신인 [[K-9 자주곡사포]]도 당연히 없었고 [[K-55]]가 아직 양산중인 상황이었다. 공군도 [[F-16]]계열기는 PB사업으로 도입한 40기가 전부로 [[MiG-29]] 30여 기를 보유한 북한과 정면대결에는 물음표가 붙었고, 해군이야 [[기어링급]]에 [[FFK]] 따위를 구축함이라고 굴리고 있는데다가 잠수함 전력도 갓 취역한 [[장보고급|장보고함]] 단 한 척이 전부였으니 북한 해군이 미사일 스팸과 잠수함으로 한국해군을 털어먹고 인천 앞바다까지 출몰하는, 지금 보면 매우, 아주 황당한 시나리오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지금은 고철 취급 받는 [[천마호]] 같은 북한군의 주력무기들도 당시까지는 어느 정도 관리가 되고 구식화도 심하질 않아서 물량으로 충분히 우세를 점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는 사람은 다들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을 압살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2020년 현재도 여전히 국방부는 남한의 군사적 열세를 이를 악물고 주장하고 일반인들이 여기에 넘어가는 판에, 지금보다도 군사력 격차가 훨씬 적었던 데다가 6.25의 트라우마도 가시지 않았던 1993년 당시에는 어느 국민도 남한이 - 아무리 미국이 있다고 해도 - 북한을 상대로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고 심지어 북진까지도 가능하다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한국방위에 대해서 지대로 확신을 주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군은 1월17일에 공습으로 전쟁을 시작했고,2월28일 종전을 선언했다. 한 달이 넘는 기간인데,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미군은 어떨련지 몰라도 한국은 그저 북한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라가 황폐화될 수 있는 시간이다.] 정작 미국의 측 워 게임에서는 북한이 승리한다는 결과가 나와서 한국 국방부가 급히 나서서 반박하는 상황이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12400329102006&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11-24&officeId=00032&pageNo=2&printNo=14926&publishType=00010|#]]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10-00_01060724.jpg]] [[1997년]]에 망명한 [[황장엽]]은 회견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미 북한 내부에서 [[핵무기]] 보유는 상식화돼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자신은 핵관련 시설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92년 국제 원자력 기구의 특별 사찰을 피하기 위해 핵 확산 방지조약에서 탈퇴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로동당]]의 비서들은 모두 핵 보유를 믿게 됐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고 이미 북한이 [[핵무기]]까지 보유했다는 것([[1997년]] 당시)으로 북한에서는 모두들 이렇게 알고(믿고) 있다"고 폭로해서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75638|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985969_19482.html|MBC]],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7071070376|조선일보]], 또한 당시 [[김정일]]은 "[[북한]]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북한]]이 망하면 세계와 함께 자폭하겠다는" 극언을 내뱉었다고 [[황장엽]]은 증언하였다. 또한 당시 북한 당국에서는 "지금까지의 전쟁에서는 미국에 포탄하나 떨어진적 없지만 앞으로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다르다"라며 "[[미국]]에도 [[북한군]]이 상륙할 수 있다"라고 주민들에게 선동하고 있다며 증언하기도 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71100209106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7-11&officeId=00020&pageNo=6&printNo=23590&publishType=00010|동아일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71100329103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7-11&officeId=00032&pageNo=3&printNo=16156&publishType=00010|경향신문]]) [[1985년]] 당시 소련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특정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북한이 그러한 [[핵실험]]을 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소련도 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4021570705|조선일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21500329101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4-02-15&officeId=00032&pageNo=1&printNo=15001&publishType=00010|경향신문]],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21500289102009&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4-02-15&officeId=00028&pageNo=2&printNo=1815&publishType=00010|한겨레]]) [[1994년]] [[7월 27일]], 북한에는 이미 [[핵무기]]를 5개나 보유하고 있으며 핵무기를 5개나 더 개발한 뒤 이를 국제사회에 발표하고 미국에 알릴 예정이라고 북한을 탈북한 북한 정무원 교원 강명도씨와 김일성대학 상급교원 조명철씨가 귀순기자회견에서 밝혀 큰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북한은 핵탄두개발과 함께 핵탄두를 탑재할 로켓개발에 열중하고 양산체제로 들어갈 것이며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타개할 방법은 핵무기의 완성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핵무기 5개로는 북한에 충분하지 않으며 공개될 경우 국제적 압력으로 더 이상의 핵개발이 불가능해질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42264|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4545_19434.html|MBC]],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4072870101|조선일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800329101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8&officeId=00032&pageNo=1&printNo=15154&publishType=00010|경향신문]]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800209101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8&officeId=00020&pageNo=1&printNo=22583&publishType=00010|동아일보]]) 이러한 강씨의 회견에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900099102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9&officeId=00009&pageNo=2&printNo=8828&publishType=00010|국내 언론들은 믿을 수 없었으나,]] 북한이 5개나 보유한 것이 가능한가라는 반응을 보였고 미국과 일본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4072970101|조선일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900329103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9&officeId=00032&pageNo=3&printNo=15155&publishType=00010|경향신문1]],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42296|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4634_19434.html|MBC]],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900329104012&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9&officeId=00032&pageNo=4&printNo=15155&publishType=00010|경향신문2]]) 당시 회견에 대해 월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무기를 1개~2개즈음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하고 미국 [[PBS]]와의 인터뷰에서도 이같이 밝혔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4636_19434.html|MBC]],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4081470605|조선일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3000209101008&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07-30&officeId=00020&pageNo=1&printNo=22585&publishType=00010|동아일보]])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서 미국 정부는 아주 단호하고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겠다고 경고하면서 결코 묵인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어 북한은 핵무기를 손에 쥐면 이를 써버릴 위험이 높은 정권이기 때문에 북한의 핵 개발은 엄청난 악몽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머지 않아 이란과 이라크가 핵개발에 성공해 미국에 대항할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북한의 핵 개발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개발의 가능성만 보이더라도 곧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돼서 이 지역의 안정이 크게 위험해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30241|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7126_19418.html|MBC]]) [[빌 클린턴|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사용하려고자 할 경우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라며 강력 경고했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30476|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7392_19418.html|MBC]]) 미국은 한국에 패트리어트를 배치하고 북은 연료봉 인출 작업을 강행하니 미 정치권에서는 선제공격 이야기까지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도 "한반도에 재래식 전쟁발발시 미국군 8~10만 명 전사를 포함해 1백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경제적 피해만 1조 달러에 이를 수 있다" 고 해서 군사적 굴복에 반대하며 온건입장을 피력했다. 하지만 클린턴의 자서전에 의하면 전면전 수행 시 입을 미국의 막대한 인명피해때문에 클린턴은 협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언론이 그리도,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보도했던 영변공습, 폭격계획은 미리, 사전에 이미 이루어진 결정이 아니라 유사시를 가정한 사전대책이었다. 막장으로 치닫던 국면은 6월 15일 카터의 방북으로 해소되기 시작했다.[* 카터 방북 당시에도 안심할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당시 국방장관이던 윌리엄 페리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카터-김일성 회담 중이었던 6월 16일 당시 영변 핵시설 공습실시여부를, 정밀타격 시나리오를 클린턴이 결정해야만 했는데, 결정을 앞두고서 개리 럭 주한미군사령관과 레이니 주한미대사가 군속 (군무원) 등을 대피시키고자 했다. 공습결단, 타격결정 1시간 전에 카터가 합의함으로써 공격은 무산되었다.] 핵담당대사였던 김삼훈에 의하면 북의 회담복귀에는 유엔 동시가입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카터의 방북은 국가적 자존심을 중시하는 북한에게 회담 복귀의 명분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지대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때 [[남북정상회담]] 제안이 수락되었는데 [[김일성]]의 사망으로 불발되고 말았다. 김일성 사망에도 불구하고 북미회담은 계속되어 94년 10월 21일에 [[북미 제네바 합의]]까지 이르러서 기본합의문이 채택된다. [[http://eng.iiri.or.kr/modules/board/bd_view.html?no=851&id=resources_oversea&or=bd_order&al=asc&p=91|#]] 반면 한국정부는 전쟁위기 해소 상황에서 문제점을 노출했다는 견해도 있는데, 당시 한국측은 북한을 국제사회로 불러내려는 노력 대신 미국강경파에 동조하려는 태도만 마냥 고수했다. 온건 대북정책을 피력하려던 [[한완상]] 통일부총리가 1년여 전 <월간조선> 등 보수언론의 집중공격을 받아서 해임됐고, 온건인사는 [[한승주]] 외무부장관이 유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